샬로트 페리앙: 그녀의 삶, 그리고 모던 디자인

15 8월, 2020
파리에 위치한 르코르뷔지에 스튜디오의 수석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던 샬로트의 작업물은 20세기 최고의 디자인 제품으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그녀는 건축과 디자인에 독특한 철학을 접목시켜 현대 인류를 위한 가구를 만들어냈다.

모던 디자인의 시대가 열림과 동시에 우리를 놀라게 하는 수많은 디자인이 탄생했다. 놀라운 디자인을 만들어낸 디자이너 중 한 명이 바로 샬로트 페리앙이다. 페리앙은 비저너리 디자이너이며 20세기 초반 당시로써는 미적 기준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던 아방가르드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샬로트 페리앙 덕분에 르코르뷔지에의 디자인이 명성을 얻게 되기도 했다. 페리앙은 그녀가 가진 현대적인 비전을 활용해 스위스 건축가의 상징적인 건물을 보완해냈다.

샬로트 페리앙이 건축가로 활동하던 시기에 건축가와 디자이너는 남성의 직업으로 여겨졌기에 페리앙의 등장은 세상을 놀라게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여성 디자이너&건축가가 흔하지 않았기에 샬로트 페리앙은 건축&디자인계의 개척자와 같은 인물이 아닌 단지 르코르뷔지에 스튜디오의 조수 정도의 인물로만 알려졌다.

그런데도 페리앙은 끊임없이 모던 디자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나갔으며 결국 아방가르드 운동을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페리앙은 르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장소에 독특한 느낌을 더해주었다. 페리앙의 손길이 닿기 전까지 르코르뷔지에의 디자인에는 다른 디자이너가 제작한 가구를 사용했다.

“가구의 핵심 요소요? 답은 간단합니다. 저장공간이죠. 집에 구성진 저장공간을 가진 가구가 없다면 집에서 공간이라 불릴만한 곳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 샬로트 페리앙 –

그녀의 삶과 커리어

샬로트 페리앙 인생과 커리어

페리앙은 1903년 파리의 제단사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1920년 페리앙은 스트라스부르 장식예술학교(Ecole de L’Union Centrale de Arts Decoratifs)에 입학해 5년간 가구 디자인에 대해 배웠다.

졸업할 무렵 페리앙은 학교에서 배운 ‘목공술과 보르자 건축양식을 합친 아트 디자인’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페리앙은 당시 등장한 수많은 기계와 엔진 차량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을 다루는 기계 시대 미학에 영감을 받았다.

24세가 된 해에 페리앙은 자신만의 디자인 세계를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페리앙은 알루미늄, 유리, 크롬으로 만든 자신만의 작품(Bar sous le Toit)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작품은 1927년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에 출품되었으며 작품이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그녀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페리앙에게도 인생을 바꾼 핵심적인 사건이 있었다. 페리앙은 르코르뷔지에의 스튜디오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르코르뷔지에는 “미안하오, 우리는 쿠션에 자수를 넣는 일은 하지 않소”라는 말과 함께 스튜디오 합류를 거절당했다.

하지만 페리앙은 한 번 거절당했다고 하여 스튜디오 합류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후 르코르뷔지에 스튜디오는 페리앙의 작품(Bar sous le Toit)을 본 뒤 그녀를 스튜디오에 합류시키기로 결정했다. 스튜디오에 합류한 이후 페리앙은 르코르뷔지에와 피에르 지네레와 10년 넘게 함께 작업했다

이후 샬로트는 르코르뷔지에의 스튜디오 인테리어 부문의 리더를 맡게 되었으며, 1928년 샐로트는 스위스에 위치한 건축 스튜디오에 사용될 세 개의 의자를 디자인하게 된다.

샬로트가 디자인한 의자는 철제 프레임과 철제관으로 제작된 의자였다. B301은 대화, LC2는 편안&안정, B306은 누워서 취침이 가능한 의자로 각 의자는 다른 용도로 설계되었다.

샬로트 페리앙: 디자인 철학

샬로트 페리앙 디자인 철학

샬로트는 그녀의 디자인이 현실적이고 집이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위해 디자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녀의 이런 디자인 철학은 사람의 일상을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미적 감각을 끌어오고 난잡함을 없애고자 하기도 했던 샬로트의 디자인 철학에는 그녀의 자유분방함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정치와 경제에 큰 관심이 있었던 만큼 샬로트는 고위 계층, 고소득층의 럭셔리한 저택을 위한 화려한 가구를 만드는 것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반대로 샬로트는 당시 있었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당시 유행했던 공산주의 원칙에 집중했다.

공산주의 원칙을 적용한 이후 샬로트는 모든 사람, 혹은 최대한 많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건축물과 디자인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

샬로트는 세상의 변화를 집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랬으며 그녀의 인테리어는 공동주택&노동자 숙소와 같은 가장 작은 공간에 조차 사용될 수 있게 설계되었다.

그녀의 이런 디자인 철학은 제품을 제작할 때 사용되는 소재에도 적용되어 디자인 설계를 할 때 누구나 구매 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 접근 가능한 소재를 골라 사용했다. 샬로트는 가구의 가격을 인하하기 위해 철을 가죽으로 대체하고 나무를 고리버들로 대체했다.

이후 샬로트는 자신의 디자인 방식을 모듈 방식 & 조립식 주택과 결합하게 된다. 공산주의 원칙과 조립식 방식을 합침으로써 샬로트는 비용을 절감시키고 작업물에 가변성까지 더하게 되었다.

샬로트 페리앙: 새로운 영향

샬로트 페리앙 새로운 영향

세계 2차대전 도중 파리는 나치에 의해 점령되었기에 페리앙은 하는 수 없이 프랑스를 빠져나와 일본으로 이동했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을 당시 페리앙은 마르세유를 떠났다. 그녀는 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떠났지만, 일본에서도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녀는 다시 한번  난민이 되어 베트남으로 피신했다.

그녀는 난민 생활을 하며 선종(불교)과 같은 다양한 것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이후 그녀의 작업물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페리앙은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소재를 사용해 그녀의 커리어에 있어서 실험적인 단계에 돌입했다.

페리에는 1999년, 9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세상을 떠나기 바로 1년 전에 자서전을 출판하기까지 했다. 페리앙의 자서전, ‘A Life of Creation’에는 지금까지도 생산되고 있는 그녀의 공간과 가구 디자인에 대한 헌신한 삶에 대해 적혀있다.

샬로트는 모던 디자인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그녀는 작업을 맡은 공간의 가구의 형태, 편의성, 기능에 대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을 즐겼다. 샬로트는 디자인계에 큰 영향을 준 뛰어난 인물이였지만 르코르뷔지에 스튜디오에서 근무하던 당시 그녀는 동료들의 그림자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는 못한 삶을 살았다.